어떤 사람이 랍비를 찾아가서 물었다. “선생님, 기도할 때 담배 피워도 되나요?” 대답은 물론 “야, 안돼.” 다른 사람은 랍비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담배 피울 때 기도해도 되나요?” 랍비가 무어라 대답했을까?
두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한 사람은 ‘노’라는 대답을 들었고, 다른 사람은 ‘예스’라는 대답을 들었다. 단지 말의 순서 하나 바꿨을 뿐인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랍비에게 물어본 첫 번째 사람은 디폴트값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두 번째 사람은 담배피우는 사람으로 설정했다. 그것이 예스와 노를 나누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대방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을까?
저 사람은 영업하려는 사람이야, 내 돈을 가져가려는 사람이야 라고 인식된다면 어떤 제안에도 ‘노’라는 답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 사람에게는 나에게 정말 좋은 것을 제안해 주려는 진정성이 보여 라고 인식된다면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예스’라는 답을 얻을 것이다.
기업들은 모두 자기 제품이 잘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제 고객들의 지식이 많아지고 파워가 세지면서 내가 잘났다고 하는 과거와 같은 마케팅방식으로는 ‘노’라는 대답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또 살아가면서 계속 ‘노’라는 대답에 부딪힌다면 한번 거꾸로 가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즉, 역발상이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을 의심해보고, 내가 맞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기합리화일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부정해보고 몸을 낮춰야 한다. 이 좀 불편한 방법이 ‘예스’라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요즘 몇몇 기업들의 행보는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이 그들인데, 이들이 비즈니스하는 방식을 보면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많은 예산을 들여 개발한 콘텐츠들을 오픈소스로 풀기도 하고, 마땅한 수익모델이 없어보이는 데도 엄청난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다.
마진 곱하기 수량이라는 가치방정식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네 생각으로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림수를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새로운 제국의 건설이다.
제국의 아이들은 기초가 되는 운영체제를 통해 표준을 장악하려 한다. 운영체제는 그들이 꿈꾸는 제국의 헌법이다. 또 응용 프로그램과 콘텐츠들은 그 제국의 법제도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그것들을 통해 제국의 문화를 만들고 우리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려는 것이다. 앞으로 몇 년 지나면 구글아파트에 살면서 애플카를 타고 다니고 페북마켓에서 쇼핑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제국의 시민들은 세금처럼 이용료와 수수료를 낸다. 여기에서는 물리적인 국가란 의미가 없다. 국가도 부도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상황이니.
19세기에는 국가가 중요했다.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물리적인 힘을 키워야 하던 때에 왕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지금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시장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서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영토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제품을 파는데서 가치가 창출되었지만 이젠 정보를 이동시키는 데서 가치가 만들어지는 패러다임으로 문법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이것을 나와는 무관한 일부 IT 업종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산업들의 특성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면, 기존의 틀과 근시안에 빠져있다는 신호이다.